
“이건 그냥 공연이 아니라,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꿈이다.” 〈슬립노모어〉를 보고 나온 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전통적인 극장의 무대와 객석 구분은 없다. 대사 없이 움직이는 배우들, 스스로 탐색해야 하는 5층짜리 공간, 그리고 흰 가면을 쓴 낯선 관객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 순간, ‘관람객’이 아니라 ‘참여자’로 변해 있었다.
나는 서울 공연을 보기 전부터 이 작품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뉴욕에서 시작된 이 이머시브(몰입형)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베이스로 하되, 대사는 철저히 제거하고 배우의 동선, 공간의 분위기, 조명과 사운드로 극의 감정을 전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깊고, 기묘하며, 감각적으로 밀도 높은 세계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슬립노모어 서울〉은 단순히 뉴욕 작품의 복제판이 아니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분위기와 건축 구조 안에 녹아든 독자적 감성을 지니고 있었고, 공연 자체도 훨씬 더 다층적이었다. 그 안에서 내가 경험한 건 ‘무언가를 본다’는 수동적인 감상이 아니라, ‘길을 잃고, 스스로 발견하며, 감정이 이끌리는 대로 움직이는’ 적극적인 몰입이었다.
익명성과 자유, 낯선 존재가 되는 감각
공연장에 들어서면 곧바로 휴대폰은 압수되고, 흰 가면이 주어진다. 말하지 말 것, 배우를 만지지 말 것, 그리고 절대 가면을 벗지 말 것. 이 규칙은 단순한 통제 수단이 아니다. 익명성이 확보된 순간, 관객은 자신의 일상적 정체성을 벗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게 된다. 나는 그 경험이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가면을 쓴 수백 명의 관객은 이제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된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고,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으며, 오직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스스로 따라가야 한다. 배우들의 움직임은 일정한 플롯을 따라 반복되지만, 내가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공연을 보게 된다. 관객은 배우를 따라 5층짜리 공간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때로는 혼자 방에 남겨지거나, 배우의 손에 이끌려 1:1 장면을 경험하기도 한다.
〈슬립노모어〉는 단 하나의 정답이 없는 공연이다. 그래서 처음엔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익숙해지는 순간 놀라운 감각적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지켜보는 내가 아니라, 내가 지켜지는 것 같은’ 시선의 역전도 느껴졌고, 언제 어디서 등장할지 모를 배우들의 움직임은 일종의 추적 게임처럼 흥미로웠다.
공간과 디테일 – 살아 있는 5층짜리 미로
이 공연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바로 공간이다. 5개 층으로 구성된 공연장은 마치 거대한 미로 같다. 호텔 방, 병원, 공동묘지, 오래된 서재, 기괴한 무도회장 등 각 층은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와 내러티브를 품고 있고, 관객은 그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공간은 한 층 전체를 차지한 폐허 같은 무도회장이었다. 조명이 어슴푸레하고, 레코드판이 느리게 돌아가며 흐릿한 음악이 깔리는 그 공간에서, 배우들은 격정적으로 춤을 추다 어느 순간 관객을 응시하거나, 구석에 앉아 울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생명체들의 세계를 엿보는 느낌을 받았다.
무대 장치는 단순히 ‘배경’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이야기의 일부였고, 작은 소품 하나, 침대 위의 혈흔, 책장에 꽂힌 엽서 한 장까지 모두가 내러티브를 암시했다. 특히 관객이 직접 물건을 만지고 문을 열어보는 것이 허용되는 점에서, 단순히 ‘무대를 본다’는 감상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하나하나의 디테일이 놀라울 만큼 정교했고,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특정 공간에서 몇 분 이상 머무르며, 거기 있는 사물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냄새를 맡으며 스스로 극의 퍼즐을 맞추는 경험을 했다.
무대 없이도 살아나는 이야기의 흐름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무대’가 없다. 대신 배우들이 무대 위가 아닌 공간 전체를 움직이며 극을 이끌어간다. 〈슬립노모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기반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텍스트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배우들의 육체적 움직임, 안무, 시선, 속도, 거리감 등 비언어적 요소로 인물의 감정과 관계를 표현한다.
놀라운 점은 대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매우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표정, 숨소리, 호흡의 템포, 걷는 방식 하나하나가 캐릭터의 상태를 보여주며, 특히 클라이맥스에 가까워질수록 신체의 에너지는 폭발적으로 분출된다.
1:1 장면은 관객에게만 보여지는 개인적인 순간이다. 나도 한 배우에게 손을 잡히고 좁은 방으로 이끌려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 공간에서 이루어진 짧은 장면은 말 한마디 없이도 깊은 감정적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조용히 내 손에 종이 한 장을 쥐여주고 사라지던 배우의 뒷모습은, 며칠이 지나서도 계속 마음에 남았다.
관람의 새로운 방식 – 해석하지 않고 느끼는 감상
〈슬립노모어〉는 해석하려 들면 복잡하고, 느끼려 하면 깊어진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장면이지?’, ‘이 배우가 누구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지만, 어느 순간 그런 궁금증보다 그냥 눈앞의 감정과 분위기에 몰입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진다.
해석은 나중 문제다.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혹은 다음 날 문득 떠오른 장면 하나가 마음을 건드릴 때, 비로소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이 공연은 ‘보고 있는 중’보다는 ‘보고 나서’ 더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관객마다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므로, 누군가는 로맨스 서사를 중심으로 따라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잔혹극의 측면에 몰입할 수도 있다. 동일한 공연인데도 회차마다 완전히 다른 장면을 보게 되는 구조 역시, 관객의 감정적 재방문을 유도하는 강력한 장치다. 나는 한 번의 관람만으로도 충분히 몰입했지만, 분명 또다시 가고 싶은 공연이었다.
마치며 – 무대가 아닌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 2시간
〈슬립노모어 서울〉은 단순히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 아니다. 그것은 ‘공연’이라는 고정된 개념을 흔들어놓는 작품이었다. 배우와 관객, 무대와 객석,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그 공간에서 나는 익명으로 존재했고, 그 익명성 안에서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을 경험했다.
공연이 끝나고 가면을 벗는 순간,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허탈함과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 꿈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아직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고’, 그것이 오래 남을 거라는 사실이다.
〈슬립노모어 서울〉은 단순히 보기 위한 공연이 아니다. 체험하고, 헤매고, 발견하고, 감정을 따라 움직이는 여정이다. 이 공연은 당신이 ‘보는’ 만큼이 아니라, ‘몸으로 겪는’ 만큼만 존재한다.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생생했고, 그래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