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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리뷰|격정과 파멸, 사랑의 서사로 그려낸 무대

by 리포터장 2026. 1. 19.

안나 카레니나 포스터 사진
안나 카레니나 포스터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넘어,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위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그리고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이 복잡하고도 섬세한 서사를 무대 위로 옮기며, 문학이 아닌 음악과 연기를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심장을 두드린다. 나는 이번 시즌 공연을 직접 관람했고, 그 체험은 단순한 문학의 재현을 넘어, 정제된 감정과 폭발적인 감성의 공존을 목격하는 시간이 되었다. 강렬한 무대,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넘버, 그리고 배우들의 진심이 깃든 연기가 어우러져, 고전이 왜 여전히 현재형의 감동이 될 수 있는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하지만 새롭게, 원작의 정수를 무대에 담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며,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개인의 사랑과 선택, 사회의 억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나의 내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안나의 파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을 테지만, 뮤지컬은 그 결말보다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파동’에 집중한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인물 간의 관계를 보다 직선적으로 다듬고, 안나의 시선과 감정선에 초점을 맞춰 서사를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관객은 한 여성의 운명과 몰락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 자신이라면 어땠을까’라는 감정적 투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점에서 이 공연은 원작의 위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무대 예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데 성공했다고 느꼈다.

무대와 연출 – 절제된 아름다움 속의 강렬한 감정

공연의 무대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절제된 톤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한 장치보다는 상징적이고 간결한 무대 전환을 통해 인물의 감정과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기차’를 상징하는 무대 연출이었다. 안나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억누르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중요한 모티프인 기차가 무대 위에서는 소리, 조명, 그리고 배우들의 동선으로 구현된다. 극 초반부터 기차의 메커니즘은 꾸준히 암시되고, 클라이맥스에서는 그 이미지가 압도적인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또한 연출은 회전무대와 입체적인 조명으로 장면 간의 흐름을 매끄럽게 연결하면서, 인물의 심리 변화까지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무대가 크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무엇을 보여줄지’에 대한 연출의 감각이 공연의 밀도를 높였고,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했다.

넘버와 음악 – 감정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서사

〈안나 카레니나〉의 음악은 러시아 정서가 녹아든 선율과 극적인 감정선이 특징이다. 첫 곡이 울려 퍼지는 순간부터 러시아 특유의 우울함과 격정이 느껴졌고, 특히 안나의 솔로 넘버들은 하나같이 감정의 복잡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곡은 ‘나는 나를 잃었다’라는 넘버였다. 이 곡은 안나가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질서와 이성을 무너뜨리고, 감정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장면에서 부르는데, 넘버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내면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슬픈 노래가 아니라, 파괴적인 사랑에 모든 것을 던진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절규 같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외에도 브론스키와의 이중창, 카레닌의 독백 넘버 등도 서사적 맥락 속에서 매우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음악이 단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물의 선택과 내면의 균열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로 쓰였다는 점에서 작품의 음악적 완성도는 매우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배우들의 연기 – 감정을 입은 문학적 존재

이번 공연에서 안나 역을 맡은 배우는 그야말로 캐릭터와 혼연일체 된 연기를 보여줬다. 처음 등장할 땐 사회적 지위와 품위를 지닌 우아한 여인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파멸로 향해 가는 과정이 연기와 노래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특히 감정의 변화가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에서도 과하거나 튀지 않고, 절제된 표현 안에서 깊은 감정선을 전달해내는 능력은 감탄할 만했다. 브론스키 역의 배우도 안정적인 가창력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단순한 유혹자나 로맨틱한 연인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브론스키를 보여준 점에서 훨씬 현실감이 느껴졌다. 카레닌 역은 특히 기억에 남는데, 그 역시 단순한 악역이나 냉혈한으로 묘사되지 않고, 시대와 도덕, 그리고 체면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오히려 안나와의 비극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전반적으로 모든 배우들이 각자의 감정과 서사를 명확히 이해하고 무대 위에 표현해냈으며, 이들의 연기가 작품 전체의 설득력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개인적인 여운 – 사랑이 전부일 수 없었던 그녀의 선택

공연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무거운 감정이 마음속에 잔잔히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모든 것이라고 믿지만, 사랑은 때때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안나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세계를 모두 버렸지만, 그 선택은 결국 자신을 소외시키고 파괴하는 길로 이어졌다. 이 뮤지컬은 그런 그녀를 단순히 ‘비극적인 여인’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나의 선택을 연민과 동정의 시선이 아닌, ‘그 시대 속에서 한 여성이 어떻게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안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제도 속에서 선택지가 없었던 한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깊고 진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 감정을 체험한 두 시간은, 단지 한 공연을 본 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함께 따라간 시간이었다.


마치며 – 문학의 감정이 음악으로 살아나는 순간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단지 고전을 각색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시대의 억압, 사랑의 황홀함과 파멸의 고통을 음악과 연기로 압축한 예술의 집약체다. 원작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읽은 사람이라면 또 다른 해석의 층위를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그 점에서 이 뮤지컬이 매우 ‘용기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감정의 지점에 서 있든, 이 공연은 그 마음 어딘가에 닿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