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팬레터〉를 봤던 날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일제강점기의 서울, 카페에서 흐르던 재즈 음악, 수상한 문인들, 그리고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진심과 혼돈.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땐 생소한 시대와 낯선 인물들이 이어지던 무대였지만, 어느 순간 가슴 깊숙이 박히는 문장과 선율들로 인해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시작된 〈팬레터〉와의 인연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이번 10주년 기념 공연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작품이 여전히 현재형의 감정과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과 그리움, 그리고 창작자의 고뇌와 순수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만드는 감동의 시간이었다.
시대와 인물 – 픽션과 논픽션 사이, 정교하게 직조된 서사
뮤지컬 〈팬레터〉는 실제 존재했던 문인 故 이상과 그를 둘러싼 문학계의 인물들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다만 이 작품은 철저히 ‘창작 뮤지컬’이며,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재현하는 전기(傳記)극이 아니다. 오히려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오가며, ‘이상과 그를 사랑했던 한 청년의 내면’이라는 감정의 핵심에 집중한 점이 이 작품의 강점이다. 배경은 1930년대 조선, 검열과 탄압, 자유를 향한 열망과 억압이 공존하던 문학의 시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간 청년 작가 정세훈, 이름을 숨긴 여류 작가 히카루, 그리고 당대의 천재 시인 김해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번 10주년 공연에서는 캐릭터들의 정서적 밀도가 훨씬 더 깊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훈의 순수함은 더 절실하게, 김해진의 고독은 더 처연하게, 히카루의 슬픔은 더 뚜렷하게 전해졌고, 이 모든 감정이 무대 위에서 팽팽하게 교차하며 관객을 끌어당겼다.
무대와 연출 – 편지로 엮은 시공간의 재구성
〈팬레터〉의 가장 큰 미덕은 ‘정적인 장르’로 여겨지는 문학과 편지를 동적인 뮤지컬 무대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무대 전체는 글과 문장이 시각화된 듯한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이번 10주년 공연에서는 공간의 활용도가 더 섬세해졌다. 편지를 쓰는 장면은 단순한 독백이 아닌 음악과 조명, 배우의 동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장면으로 바뀌었고, 시가 낭독될 때는 무대 전체가 하나의 ‘시의 공간’으로 바뀌는 듯한 연출이 돋보였다. 펜촉 소리, 종이 질감, 잉크가 번지는 효과 등 시각적·청각적 디테일이 무대를 문학적 경험의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스쳐 지나가는 후반부의 연출은, 무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다’는 감각을 관객에게 전했다. 반복된 장면 전환 없이도, 시간과 감정이 충분히 흐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연출의 힘이 공연 전체를 조용하지만 강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음악과 넘버 – 감정을 쌓고 흔드는 선율
〈팬레터〉의 음악은 작위적인 감정 유도를 피하면서도, 서사와 감정을 자연스럽게 쌓아 올리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한 곡으로 모든 걸 설명하는’ 뮤지컬이라기보다는, 짧고 잔잔한 선율이 서사 속에 스며들며 감정을 완성하는 구조에 가깝다. 이번 10주년 공연에서도 기존 넘버들의 감정선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배우들의 해석에 따라 같은 곡이 전혀 다른 감정으로 전달되었다. 예를 들어 정세훈의 넘버인 ‘그대에게 가는 길’은 절절한 순정과 동경이 동시에 녹아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히카루의 ‘나는 오늘도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는 짝사랑과 외로움, 그리고 작가로서의 갈등이 겹쳐지며 울림을 더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넘버는 김해진의 ‘슬픈 날엔’이었다. 이 곡은 말 그대로 ‘절제된 고통’을 표현하는 곡인데, 배우의 호흡, 시선 처리, 그리고 간결한 멜로디가 맞물리며 극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번 공연을 통해 다시 느낀 건, 〈팬레터〉는 넘버의 강렬함보다 ‘문장처럼 천천히 스며드는 감정’이 진짜 힘이라는 것이다.
배우와 캐릭터 – 10년의 시간이 만든 깊이
뮤지컬 〈팬레터〉는 ‘배우와 캐릭터가 함께 성장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번 10주년 공연에 참여한 배우들 중에는 초연 멤버도 있었고, 중간에 합류해 오래 작품을 함께한 배우들도 있었다. 특히 세훈과 해진, 히카루 역의 트리플 캐스트는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주면서도 작품의 정서를 흔들림 없이 지켜냈다. 내가 본 회차에서는 정세훈 역의 배우가 특유의 담백하고 투명한 목소리로 세훈의 순수함을 깊이 있게 표현했고, 김해진 역의 배우는 내면의 균열과 예술가로서의 고독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히카루는 감정의 농도가 높은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과장되지 않게 풀어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배우들이 극 중 인물의 ‘문장’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내는’ 듯한 무대였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신뢰와 호흡,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이번 공연을 더욱 밀도 있게 만든 이유다.
개인적 인상 – 편지라는 방식으로 기억되는 사랑과 진심
공연이 끝난 후 나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끝나고 나면 강한 감정보다 묵직한 여운이 남는 뮤지컬이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가 전해지든, 혹은 끝내 부치지 못한 채 남겨졌든,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여전히 우리를 지탱해주는 감정의 조각으로 남아 있다. 〈팬레터〉는 그런 감정의 형태를 무대 위로 불러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아무 이름도 없이 존재했던 진심들이 조용히 울린다. 10년이 지났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유효하고 현재적이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에 더 많은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의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오래 접어 가슴에 넣어두는 것 같은 그런 공연이었다.
마치며 –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문장 같은 뮤지컬
뮤지컬 〈팬레터〉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감정을 건넸다. 그것은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작은 어디서 오는가’, ‘진심은 언젠가 닿을 수 있는가’ 같은 본질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이번 10주년 공연은 그 질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더 깊어진 감정으로 응답한 무대였다. 관객으로서 이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영광스럽고, 이 작품이 또 다른 10년을 향해 계속 걸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떤 작품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팬레터〉는 그 중 하나다. 당신에게도, 이 진심이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