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을 본 후 며칠이 지난 지금도, 뮤지컬 〈트레이스 유〉의 몇몇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된다. 극 중 한 인물이 했던 대사, 무대 위의 절제된 조명, 그리고 배우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시선까지. 솔직히 말하면 처음 이 작품을 보려고 예매할 때까지도 ‘기억’과 ‘진실’을 추적한다는 줄거리 설명이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졌고, 과연 몰입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공연을 마주한 순간부터 끝나는 그 순간까지,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심리 드라마를 눈앞에서 해부하는 듯한 몰입감을 경험했다.
기억을 중심에 둔 서사, 그러나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

〈트레이스 유〉는 기억을 잃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어떤 계기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잃은 채 서로를 마주한 여섯 명. 관객은 이들의 ‘과거’를 함께 추적해나가는 동행자가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기억 찾기’에 그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기억 그 자체라기보다,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관계, 그리고 각자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다. 극이 진행되며 서서히 드러나는 과거의 조각들은, 결국 인물들이 ‘나 자신을 직면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는 단지 캐릭터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관객 각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기억을 외면하며 살아왔는가’, ‘내가 믿는 나는 과연 진짜 나인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서사와 구조 – 반전과 몰입의 정점
공연은 단일한 시간 순서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물들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구조 속에서, 관객은 단서를 모으듯 퍼즐을 맞춰가게 된다. 초반에는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공연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 방식이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된 연출인지 실감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방식은 오히려 인물들의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특히 특정 인물의 과거가 밝혀지며 이어지는 감정의 폭발은, 단순한 대사나 설명 없이도 관객이 상황을 ‘느끼게’ 만든다. 그 순간의 감정선은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정교하게 쌓아올린 서사가 만들어내는 반전과 결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과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은 단순한 플롯의 반전 때문이 아니라, 극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메시지에 기인한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력 – 감정을 쥐고 흔드는 몰입의 힘


내가 관람한 회차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종석 배우의 연기가 특히 인상 깊었다. 그는 복잡한 감정을 절제된 톤으로 표현하면서도,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감정의 파고를 섬세하게 전달했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겪는 혼란, 그리고 점점 진실에 다가설수록 흔들리는 심리 상태를 디테일하게 표현해내며, 관객을 극 속으로 깊게 끌어들였다. 또 다른 인물인 박규원 배우는 극 전반에 걸쳐 안정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정체성이 밝혀지는 후반부에서의 감정 폭발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눈빛 하나, 목소리 떨림 하나까지도 진심이 느껴져, 공연장을 떠날 때까지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배우들의 호흡이 중요한데,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보다도 침묵 속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순간들이 더 많다. 그만큼 연기력과 감정 몰입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구조다. 내가 본 회차의 배우들은 그 요구치를 완벽히 채워줬다.
무대, 조명, 음향 – 절제된 미학 속에 숨겨진 감정의 언어
〈트레이스 유〉의 무대는 단순하다. 거대한 구조물이나 화려한 장치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공간의 변화를 조명과 배우의 동선으로 표현해낸다. 무대 전체가 마치 하나의 심리 공간처럼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조명이 인물의 감정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누군가 과거를 마주하는 순간, 조명이 인물의 그림자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며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혹은 조명이 완전히 꺼진 어둠 속에서 배우 한 명의 독백이 이어질 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음향 역시 절제되어 있지만 효과적이다. 필요 이상으로 음악을 사용하지 않고, 침묵의 순간을 통해 오히려 감정을 강조한다. 한 장면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은, 긴 대사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런 방식은 공연 내내 인위적인 연출을 배제하고, 인물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트레이스 유〉를 추천하는 이유
이 작품은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는 공연이다. ‘기억’이라는 소재는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이 작품은 그 안에서 ‘외면하고 싶은 진실’과 ‘나에 대한 질문’을 꺼내 들며, 관객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나는 이 공연을 보는 내내 마치 내가 그 인물 중 하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잃은 인물들처럼, 나 역시 내 안의 어떤 감정이나 경험을 잊고 지내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공연은 관객 각자의 삶과 맞닿아 있다. 감정의 강도를 억지로 끌어올리거나, 눈물 짜는 장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끝나고 나면 마음 깊은 곳을 누르고 있는 감정을 건드린다.
공연을 더 잘 즐기기 위한 팁
관람 전에 작품에 대한 정보는 너무 많이 접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반전의 여지가 큰 작품이기 때문에, 사전 정보 없이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게 몰입감 측면에서 훨씬 좋다. 대신, 인물 간 관계 구조만 간단히 파악하고 가는 것은 도움이 된다. 좌석은 정중앙에서 약간 뒤쪽이 전체 무대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았다. 조명이 배우의 표정이나 그림자를 이용한 연출이 많기 때문에, 너무 가까운 자리보다 전체적인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가 더 만족스러웠다. 공연 시간 동안 집중도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핸드폰은 미리 완전히 꺼두는 것을 추천한다. 사소한 진동 소리조차 공연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
마무리하며 –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 단 하나의 공연
〈트레이스 유〉는 단순히 잘 만든 뮤지컬이라는 수식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의 마음 어딘가를 붙잡고 놓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이 공연은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라,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 가족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 혹은 상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 역시 공연장을 나오는 길에 문득 잊고 지낸 어떤 감정을 떠올렸다.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추적하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야말로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트레이스 유〉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감정을 흔드는 ‘경험’이었다. 단 한 번의 관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공연 리스트 가장 위에 올려두게 되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읽고 공연을 고민하고 있다면, 꼭 한 번은 직접 경험해보기를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잊고 있었던 어떤 감정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