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공연은 작품을 보기 전과 후의 감정 결이 확연히 달라진다. 뮤지컬 〈이터니티〉는 나에게 그런 경험이었다. ‘영원’이라는 단어는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부담스럽다. 사랑이든 기억이든, 혹은 존재 자체든 ‘영원하다’는 것은 듣기에 아름답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욕망이다. 〈이터니티〉는 이 막연하고도 철학적인 개념을 무대 위에 풀어낸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나는 평소에 SF나 시간 개념을 다룬 서사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 작품은 그 장르적 틀을 가져오되 너무 어렵게 풀지 않았고, 감정과 관계 중심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몰입감 있는 전개로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이 극을 끌고 가는 중심축이 되어, 관객으로서 진심으로 이 세계를 믿고 따라갈 수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고치겠습니까?

〈이터니티〉의 서사는 과거와 미래,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어떤 사건을 되돌리기 위해 ‘기억 조작 기술’이 존재하는 세계. 이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과거의 실수를 그대로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기억만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진짜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주인공 ‘지후’는 기억을 지우고, 다시 쓰고, 사랑을 붙잡기 위해 과거를 반복한다. 처음에는 그저 SF적인 흥미로 바라보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이 설정은 하나의 감정 장치로 작용한다. 과거의 상처를 반복해서 마주하고, 그 감정을 이겨내는 대신 삭제해버리는 지후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인간적이다. 누구나 상처받은 기억은 지우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지워진 기억은 삶을 온전히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단호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지후가 반복된 선택 끝에 마침내 감정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묵직한 울림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스토리의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요소 때문이 아니라, 그의 혼란과 후회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음악이 이끄는 감정의 흐름 – 감정을 짚는 넘버의 강점

〈이터니티〉의 음악은 단순한 삽입곡이 아니다. 극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선의 흐름을 음악이 정확히 짚어내며, 각각의 넘버는 서사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 특히 주인공 지후의 솔로 넘버는 감정의 깊이와 서사가 맞물려 폭발적인 몰입을 이끈다. 첫 번째 솔로 곡에서는 아직 감정을 숨기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후가 그려지고, 후반부에 나오는 리프라이즈 넘버에서는 그가 변화한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같은 멜로디 안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담겨 있는 방식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상대 배역과의 듀엣이 단순히 로맨스를 위한 장치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 오해와 불신이 존재하는 관계 속에서도 음악은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특히 절제된 피아노 라인 위에 얹어진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엇갈리는 장면은 극적인 효과를 주기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더 아팠다. 뮤지컬 넘버가 자칫 설명적이거나 과잉 감정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잘 피해가면서, 음악으로 감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SF와 감정의 경계 – 무대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연출
사실 기억 조작, 시간 이동, 감정 프로그램 같은 소재는 자칫 잘못 사용하면 관객과의 거리감을 키울 수 있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이거나, 감정 이입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터니티〉는 연출적인 힘으로 이 경계를 설득력 있게 넘는다. 무대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복잡한 구조 없이 빛과 음악, 소품 몇 가지로 공간을 전환한다. 이로 인해 SF적 세계관이 과도하게 부각되지 않고, 배우의 감정이 돋보이는 구조가 유지된다. 특히 기억 조작 장면에서 보여지는 조명 효과와 무대 전환은 기술적으로도 훌륭했지만, 그보다 ‘기억이 흔들리는 감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 깊었다. 마치 꿈을 꾸듯, 무대 위 장면이 부유하고, 조명이 무너지고, 음악이 번지듯 흘러가는 그 감각은 지후의 혼란을 관객에게 직접 체감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내가 앉아있던 관객석에서도 연출의 강약 조절이 매우 훌륭하다는 얘기가 많이 들렸고, 복잡한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설정은 특별하지만, 결국 이야기 중심은 인간의 감정이기에 관객으로서 충분히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었다.
배우들의 에너지 –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감정을 밀도 있게 그리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힘은 역시 배우들이었다. 주인공 지후 역을 맡은 배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일정한 호흡으로 끌고 가며, 관객을 극 안에 머물게 했다. 특히 후반부 기억이 무너지고 감정이 터지는 장면에서도 지나치게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의 여백을 통해 슬픔을 전달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눈물보다 고요한 목소리가 더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이 증명한 셈이다. 상대 배역 역시 섬세한 감정 연기로 캐릭터의 입체성을 살렸다. 단순한 ‘상대역’이 아니라 스스로의 서사를 가진 존재로 무대에 올라 있었고, 그 덕분에 관계의 진정성이 살아났다. 두 배우의 호흡은 극 전체의 리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작은 시선 교환 하나에도 감정선이 실려 있었다. 이처럼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쌓아가는 연기 방식은 오히려 극의 울림을 깊게 만들었고, 객석에서도 순간순간 들리는 숨죽임이 그 몰입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무리하며 –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
〈이터니티〉는 기억을 지우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기억을 되찾고 마주하는 이야기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오래 기억하길 바라고, 어떤 기억은 지워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 작품은 그런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극이 끝난 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여운이 너무 깊게 남았고, 단지 공연을 본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직접 겪고 나온 기분이었다. 기억이라는 건 결국 나를 구성하는 조각들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터니티〉는 단순한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억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여정의 끝에서 한동안 마음이 울렸다. 내가 겪은 감정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품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