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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렘피카〉 관람 후기|강렬한 시각과 서사, 그리고 감동

by 리포터장 2026. 1. 26.

렘피카 포스터 사진

최근 내가 본 뮤지컬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렘피카〉였다. 단순한 전기 뮤지컬이나 예술가의 삶을 다룬 무대로 생각하고 갔던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밀도와 에너지로 다가온다. 나 역시 그렇게 이끌렸고,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렘피카〉는 단지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을 조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술과 정치, 여성성과 정체성, 시대의 격변 속에서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한 인물의 치열한 발자취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음악, 연기, 미장센, 무대 기술이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관객에게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낯설지만 강렬한 인물, 타마라 드 렘피카

캐스팅 사진

많은 관객에게 ‘렘피카’라는 이름은 낯설 수 있다. 하지만 무대가 시작되고 몇 장면이 흐르기도 전에, 그녀는 그 낯섦을 단단한 존재감으로 밀어낸다. 러시아 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귀족 출신의 화가이자,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현대성을 대담하게 그려낸 아르데코의 대표 화가. 〈렘피카〉는 그녀의 예술 세계와 더불어, 그가 맞서야 했던 시대의 이념, 성적 정체성, 가족과 사랑, 예술가로서의 야망을 한층 깊게 파고든다. 타마라를 연기한 배우는 시종일관 에너지 넘치면서도 섬세한 내면을 표현하며 이 어려운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특히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에도 발성과 감정선이 무너지지 않고, 철저하게 절제된 톤을 유지하면서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무대와 음악, 렘피카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다

〈렘피카〉의 무대는 시각적으로 대단히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일반적인 시대극이 연상시키는 복고적인 미장센 대신, 미니멀하면서도 아방가르드한 무대 디자인을 통해 렘피카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의 격동적인 분위기를 재해석한다. 조명과 영상 디자인이 무대 전환을 매끄럽게 이끌고, 인물의 심리 상태를 시각화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렘피카가 겪는 심리적 혼란이나 갈등의 순간에는 조명이 날카롭게 분할되며 그녀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렘피카의 예술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에는 과감한 색채와 대칭적 무대 구성이 강조되어 그녀의 작품 세계를 오마주한다. 음악은 전통적인 뮤지컬 넘버보다는 락과 재즈, 일렉트로닉의 요소가 절묘하게 섞여 있어 시대적 배경과 현대적 감성을 동시에 담아낸다. 이러한 음악적 접근은 렘피카의 선구자적 정체성과도 잘 맞아떨어지며, 작품 전반에 신선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관계로 말하는 렘피카 – 라파엘라와의 서사

〈렘피카〉에서 가장 큰 서사적 축 중 하나는 렘피카와 모델 라파엘라와의 관계다. 이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두 사람의 감정은 억압과 해방, 동경과 자기 탐색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선으로 엮여 있으며, 이를 풀어내는 방식이 섬세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라파엘라의 등장은 렘피카의 삶에 균열을 내지만, 동시에 그녀의 예술과 정체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된다. 두 인물 사이의 긴장감은 마치 한 폭의 회화처럼 격렬하면서도 아름답게 무대 위에 펼쳐진다. 특히 두 배우의 듀엣 넘버는 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로, 감정의 밀도를 음악으로 폭발시키는 순간들이 많다. 이 장면들은 단지 스토리 전달을 넘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의 진짜 자아는 누구인가’, ‘우리는 언제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가’ 같은 본질적인 질문들이다.

뮤지컬로 만나는 시대와 이념의 충돌

렘피카의 삶은 예술가 개인의 이야기인 동시에, 시대와 이념, 신념의 충돌을 보여주는 서사다. 〈렘피카〉는 단순한 전기 뮤지컬이 아니라, 20세기 유럽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유와 억압, 예술과 정치, 사랑과 체제 간의 대립을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렘피카는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혁명을 피해 도망쳐야 했고,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했다. 또한 여성 예술가로서의 자리매김, 동성애자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시선, 어머니이자 연인이자 창작자로서의 내적 갈등 등 복잡한 정체성의 교차점에 서 있었기에, 그녀의 서사는 단순히 예술가의 삶이 아닌 시대의 삶으로 확장된다.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선택은 보다 정치적이고 명확해지며,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켜내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이 과정은 드라마틱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렘피카라는 인물에 대한 감정적 이입을 가능케 한다.

관람 후 돌아오는 여운 – 강렬한 초상, 그리고 나의 선택

〈렘피카〉를 보고 나오며 가장 오래 남았던 감정은 ‘불편함 속의 존경’이었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편안한 감정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게를 지녔다. 단순히 즐겁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과 이어지는 메시지를 던진다. 예술은 과연 체제를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여성의 야망은 언제까지 위협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사랑의 형태는 누가 정하는가. 렘피카는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릴 뿐이다.” 이 대사가 공연 내내 반복되며, 관객 각자의 마음에 스스로를 마주 보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나 역시 렘피카를 통해 ‘나는 내 삶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고, 이 작품을 단순히 예술적 경험이 아닌 하나의 자기 성찰의 장으로 기억하게 됐다.


마무리하며

〈렘피카〉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다. 서사가 복잡하고, 음악이 전통적이지 않으며, 시각적 요소가 대담하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낸 감정의 파도는 결코 얕지 않다. 나는 이 공연을 통해 예술이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의 깊이와 사유의 넓이를 다시금 체감했다. 렘피카라는 인물은 시대를 앞서간 화가였고, 그를 무대 위로 불러낸 이 작품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무대였다. 공연을 보며 느꼈던 감정, 시각적 충격, 음악의 힘, 인물들의 고뇌 모두가 한 편의 그림처럼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