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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긴긴밤〉 리뷰|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무대, 마음을 어루만지다

by 리포터장 2026. 1. 21.

뮤지컬 긴긴밤
뮤지컬 긴긴밤

누군가는 이 작품을 어린이 뮤지컬이라 하고, 누군가는 동화적인 세계라 말한다. 하지만 내가 뮤지컬 〈긴긴밤〉을 보고 난 후 가장 강하게 느낀 건, 그것이 ‘어른을 위한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한 북극곰과 펭귄이 등장하는 동물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상실, 그리움, 책임,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나는 공연을 보며 몇 번이나 울컥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눈물을 훔쳐야 했다. 이렇게 담백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은 흔치 않다. 뮤지컬 〈긴긴밤〉은 누군가의 마음 한 조각을 살포시 감싸 안아주는 듯한 무대였다.

따뜻한 여백의 서사 – 동물의 여정을 빌려 말하는 삶의 은유

〈긴긴밤〉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큰 전염병 이후 버려진 동물원에서 북극곰 ‘폴라’와 펭귄 ‘나나’가 만나 함께 동물원을 탈출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 이 단순한 플롯 속에는 무거운 감정과 묵직한 주제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함께하게 된 둘이지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을 존중하며, 결국엔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 중심이다. 그 속에는 우리가 자주 놓치곤 하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건 무엇일까?’, ‘가족이란 꼭 피가 섞여야만 가능한 걸까?’,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고 또 사랑하는 걸까?’ 공연을 보는 내내 나는 폴라와 나나의 여정에 감정 이입을 하며, 자연스럽게 내 삶도 함께 되돌아보게 되었다. 뮤지컬이 단순한 판타지가 아닌, 현실과 정서적으로 맞닿아 있는 동화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특히 많은 어른들의 마음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무대와 연출 – 여백을 활용한 상상력의 확장

〈긴긴밤〉의 무대는 여백이 많고 과하지 않다. 오히려 그 간결함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동물원 철창과 눈 덮인 벌판, 황폐한 도시 풍경이 세트와 조명, 그리고 배우의 움직임으로 은유되며, 관객은 각자의 기억 속 ‘긴긴밤’을 꺼내 보게 된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장면은 나나가 홀로 남겨졌던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이었다. 단순한 조명 변화와 무대 뒤에서 울리는 한 줄기 음향만으로도 무대의 공기가 바뀌었고, 그 장면은 관객석 전체를 정적 속에 몰아넣었다. 이 작품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보다, 무엇을 감추고 여백으로 남겨두는지를 더 잘 아는 공연이다. 아이들이 보기에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템포는 유지되지만, 동시에 성인 관객도 깊은 몰입을 할 수 있도록 디테일한 연출이 설계되어 있었다. 배경이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감정은 오히려 더욱 풍부하고 깊었다.

음악과 넘버 – 말보다 진심이 먼저 닿는 선율

이 뮤지컬에서 음악은 단지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다. 넘버의 구성은 의외로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매우 풍부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곡은 나나가 부르는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였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느끼는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이 곡은, 단순한 멜로디지만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특히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나 어른이 되어도 남는 고독함을 떠올리게 했고, 곡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폴라와 나나의 듀엣 넘버 역시 감정선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끌었고, 두 캐릭터가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여정을 음악적으로도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연주도 잔잔하고 따뜻한 음색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극의 정서와 잘 맞았고, 넘버 사이사이 삽입된 연극적인 말과 음향 디자인도 감정의 여운을 끊김 없이 이어줬다.

배우들의 연기 – 동물이 아닌 인간의 진심으로

〈긴긴밤〉은 인간이 아닌 동물 캐릭터가 중심이지만, 배우들은 그 동물을 흉내내기보다 그 감정을 연기했다. 이는 공연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본 회차에서 ‘폴라’를 연기한 배우는 강인한 듯하지만 누구보다 다정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처음엔 무뚝뚝하고 다정하지 않아 보였지만, 점점 나나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미래를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진짜 보호자 같은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나나’ 역할을 맡은 배우 역시 밝고 경쾌한 에너지 속에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담아내며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나나의 눈빛 연기는 공연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 정도로 강한 몰입감을 주었고, 그 진심이 무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두 배우의 호흡은 단순히 대사나 노래의 주고받음을 넘어, 함께 시간을 쌓아가는 감정의 흐름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개인적인 여운 – 긴긴밤을 지나 아침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 거창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폴라와 나나가 함께 긴 밤을 건너는 여정을 통해 내가 다시 꺼내보게 된 건, 어린 시절 감정의 흔적, 내가 지키고 싶었던 누군가, 그리고 내가 너무 오래 외면해온 내 마음 한 조각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모두가 저마다의 ‘긴긴밤’을 지나고 있다. 그런 시대에 이 작품은 말한다. 우리가 함께라면, 혼자지만은 않다고. 뮤지컬 〈긴긴밤〉은 어떤 거대한 드라마도, 화려한 서사도 없지만, 그 안에서 누구보다 선명한 감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꼭 한 번은 필요했던 그런 이야기. 나는 이 공연을 보고, 조금은 덜 외로워졌다.


마치며 – 조용한 위로를 전하는 창작 뮤지컬의 힘

뮤지컬 〈긴긴밤〉은 창작 뮤지컬이 어떻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른들이 더 많이 울고 더 오래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다. 대사 한 줄, 노래 한 소절, 조명 한 줄기마저도 계산된 듯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잊고 지냈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공연장을 나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도 나처럼 긴긴밤을 지나고 있을까?" 그 밤이 조금 덜 춥고 덜 외롭기를, 이 작품이 그 누군가에게도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