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창작 뮤지컬 초연이라는 말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해외 라이선스 작품들에 비하면 완성도가 떨어질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몽유도원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이 시작됐을 때, 저는 한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고모와 눈만 마주친 채 말없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 둘 다 방금 뭔가 엄청난 걸 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1막 엔딩, 도미의 생존 의지가 주는 충격
몽유도원은 도미 부부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백제의 왕 여경이 꿈속에서 본 여인을 닮은 아랑을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 도미와 바둑 내기를 벌입니다. 도미는 내기에 지고, 아랑을 빼앗기고, 두 눈마저 잃은 채 배에 실려 떠내려갑니다.
이 장면이 1막의 끝이었습니다. 제가 예상한 건 비극적인 절규나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히려 삶의 의지를 다집니다. "어떻게든 살겠지요"라는 가사가 구슬프게 시작되더니, 점점 힘차게 변해갔습니다. 체념처럼 들렸던 "어이해"가 어느새 말을 모는 듯한 "하이야"로 들렸습니다.
저는 그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비극의 정점에서 오히려 생존을 다짐하는 이 반전이, 마치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온 한국인의 정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도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보다 아랑의 안부를 빌며 "부디 살아만 있어 달라"고 노래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모든 뮤지컬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막에서는 의외로 여경의 이야기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1막에서는 그저 떼쓰는 왕처럼 보였는데, 2막에 들어서니 정치적 불안과 고독 속에서 꿈속 아랑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정이 이해됐습니다. 구원받고 싶었던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립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
몽유도원은 음악적으로도 정말 탄탄했습니다. 서양 오케스트라와 국악, 판소리가 어우러지는데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목지국 비아가 부르는 기원의 소리는 마치 관객도 의식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줬습니다.
많은 분들이 백미로 꼽는 장면이 바둑 대국 장면입니다. 도미와 여경의 승부가 흑과 백의 앙상블 군무로 확장되면서 운명이 결정되는데, 현대무용으로 풀어낸 연출이 정말 화려했습니다. 영상 연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영상을 쓴 무대는 평면적으로 느껴져서 아쉬울 때가 많았는데, 이 작품은 수묵화가 배경으로 넘실거리고 그 위에 입체적인 세트가 배치되면서 영상이 보조 역할을 제대로 했습니다.
제가 본 캐스트는 여경 역의 김주택 배우, 아랑 역의 유리아 배우, 도미 역의 이충주 배우였습니다. 김주택 배우는 성악 전공자라서 그런지 압도적인 가창력으로 삐뚤어진 왕을 표현했고, 유리아 배우는 연기와 노래 모두 밀도가 높았습니다. 이충주 배우의 도미는 한이 서려 있어서 마치 창극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작품은 4월에 샤롯데 시어터에서도 공연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국립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국립극장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보는 몽유도원은 훨씬 더 의미 있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극장 자체가 주는 정취가 작품과 잘 어울렸습니다.
정리하면, 몽유도원은 창작 초연임에도 해외 진출이 확정될 만큼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한국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닫혀 있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한동안 도미의 노래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꿈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메시지를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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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9578